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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사의 그림자 - 살아있는 죽음, 그 쓸쓸한 절망에 대하여

가산면 2024. 11. 30. 02:09

"고독사(孤獨死)." 뉴스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단어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짧은 기사, 숫자로 표현되는 통계 자료 속에서 그 단어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오늘, 그 단어가 나를 향해 날아와 박혔다.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고독사라는 단어, 남의 일 같나요? 혼자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 있나요?"

질문은 잔인할 만큼 예리했다. 마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불안, 바로 '죽음 불안(Death Anxiety)'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심리학자 어니스트 베커는 그의 저서 '죽음의 부정'에서 인간은 동물과 달리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이로 인해 엄청난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혼자 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나의 죽음 불안은 끊임없이 증폭되어 왔다. 밤늦도록 불 꺼진 아파트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다 잠이 들 때, 텅 빈 냉장고를 열 때,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혼자 집에 있을 때, 그럴 때마다 고독사라는 단어는 유령처럼 나를 떠돌았다.

나는 그 유령을 쫓아내기 위해 애썼다. "나는 혼자가 편해", "결혼은 구속일 뿐이야", "자유로운 삶이 최고야"라고 되뇌면서. 마치 '테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에서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세계관이나 자존감에 의존한다고 한다. 나는 나만의 세계관을 만들고,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존감에 기대어 살아왔다. 마치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 것처럼.

하지만 오늘, 그 유령은 더 이상 쫓아낼 수 없을 만큼 강력하게 나를 덮쳐왔다. 질문은 나를 거울 앞에 세웠고, 나는 비로소 혼자 늙어가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이고, 주름진 얼굴, 굽은 허리, 그리고 쓸쓸한 눈빛. 그 모습은 내가 꿈꿔왔던 멋진 싱글 라이프와는 거리가 멀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혼자 죽는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아무도 나의 죽음을 알아주지 않고, 차가운 방바닥에 방치된 채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난 후에야 발견될 나의 모습. 게다가 그 죽음이 고통스러운 질병이나 사고로 인한 것이라면?

끔찍한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도움을 요청해도 아무도 듣지 못한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도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혼자,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며칠 뒤, 부패한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에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친다. "변사자는 50대 남성으로 추정되며, 사망 원인은 심근경색으로 추정됩니다. 사망 추정 시각은 약 3주 전입니다..." 나의 죽음은 그렇게 한 줄짜리 뉴스 기사로 처리될 것이다.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그저 숫자 하나에 불과한 죽음.

더욱 끔찍한 것은, 아무도 찾지 않는 나의 낡은 아파트가 '고독사' 딱지가 붙은 채 헐값에 팔려나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의 죽음을 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나의 흔적을 지우고 그들의 삶을 채워나갈 것이다.

나의 존재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한성 인식(Mortality Salience)'이 나를 덮쳐왔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달았을 때,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존재를 영속시키려는 욕구를 강하게 느낀다고 말한다. 시간은 유한하고, 나의 삶도 언젠가는 끝이 난다는 사실, 그리고 그 끝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비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회의감이 들었다. 젊음, 자유, 성공,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질 허상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내 삶의 흔적, 내 존재의 의미는 어디에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차갑게 빛나고 있었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는 나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공허함만이 나를 짓누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공허함 속에서,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내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었다. 죽음 이후에 찾아올 '잊혀짐'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존재로 사라져 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독사였다.

나는 이 끔찍한 진실 앞에서 몸서리쳤다. 그리고 동시에, 어떤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어쩌면...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고독사일지도 몰라.'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 숨은 쉬고 있지만,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도 나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 삶.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동안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고독 속에 갇혀 있었다. 관계를 맺는 것이 귀찮고,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엇이었던가?

텅 빈 아파트, 냉장고에 쌓여가는 인스턴트 음식들, 의미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그리고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고독과 불안. 이것이 내가 원했던 삶이었던가?

나는 이제 깨달았다. 진정한 삶은 연결 속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고, 세상과의 연결 고리는 희미해졌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도 없다.

장례식장은 텅 비어 있었다. 형식적인 조화 몇 개와 싸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최소한의 의례를 위해 모인 직계 가족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보다는 당혹감과 어색함이 더 짙게 묻어났다.

나의 죽음은 그들에게 슬픔이라기보다는, 처리해야 할 귀찮은 일거리에 불과했다. 그들은 나의 삶에 대해, 나의 고독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삼촌은 왜 결혼 안 하셨어요? 혼자 살면 편하긴 하지만..." 조카의 물음에 형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그냥... 인연이 없었나 보다."

인연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내가 인연을 끊어낸 것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세상과의 연결을 거부한 결과였다.

나는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에도 고독사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고독 속에 갇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다. 혼자 살기로 선택한 나의, 비참하고도 쓸쓸한 결말이다.